DIARY IN PRAGUE

호기심에서 시작된 프라하 교환학생

라이꼬끼 2021. 9. 30. 02:56

지금까지 만들어온 삶의 커다란 결정에는 대부분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이 영향을 주었다.

궁금하면 직접 가보고, 직접 보고 물어보아야 믿을 수 있었고 속이 후련해졌다.

 

교환학생을 준비하겠다며 행동으로 옮기게 된 데에는, 주변의 언니들의 영향이 컸다. 연구실에서 졸업작품을 하고 있던 4학년 언니들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미국과 핀란드에서의 교환학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항상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했고, 비용에 대한 현실적인 계산도 도와주었다. 그렇게 꿈이 점점 구체화되다가 제대로 행동으로 옮기게 된 데에는, 멋있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존경하는 언니들의 이야기가 힘을 발휘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니 해외여행을 자유로이 가지 못하는 게 아쉽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해외에 대한 호기심에 불이 지펴졌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 돈이 없었다.

"돈은 어떻게 모으죠? 저는 돈이 없는데요."

"휴학하고 일 년 동안 벌면 되지. 한 달에 백만 원을 벌면 천만 원은 충분히 모을 수 있어."

이렇게 쉽게 고민이 해결되었다.

 

출국이 결정되고 나서는, 존경하는 우리 과 교수님께서 유학을 하신 경험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가서 무엇을 얻어오고 싶은지, 우선순위를 잡아놓으면 방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며칠 고민해보니, 막연하게 해외 생활을 해본다는 것 말고도, 크게 세 가지를 얻어오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

 

먼저, 여행을 좋아하니까, 유럽 여행을 많이 하고 싶었다. 나라가 많으니 그만큼 다양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한 달에 한 도시를 여행하면 열두 곳이고, 방학을 이용하면 스무 곳은 갈 수 있으니.

 

다른 하나는,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었다. 영어란 나에게 극복의 대명사였다. 중학생 때, 평균을 깎아먹던 영어를 잘할 방법을 모르니, 무작정 교과서 CD를 틀어 지문을 달달 외웠다. 학원을 다닐 형편이 안됐기 때문에 그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연습장과 손날이 새카매지도록 써내려 가다 보면, 나는 영어는 정말 사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영어랑 사이가 안 좋았던 나에게는 프라하가 오히려 비영어권이기 때문에 더 자신감을 가지고 오기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국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서 영어를 쓰도록 노력한다면, 충분히 실력을 늘릴 수 있는 환경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수줍기 때문에 용기 내어 한마디라도 뱉어볼 수 있는 환경이 가장 필요했다.

그렇게 교환학생 생활이 반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내 친한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우면서 한나절 세상에 관해 재미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웠던 영어가, 국적을 불문하고 친구를 맺을 수 있게 나를 뒷받침해주는 존재가 된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일하기로 결정하기 전에, 타지에 있으면 내가 과연 즐겁게 살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문화와 생활의 차이에서 불시에 불편함이 올 텐데, 이를 내가 잘 극복해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더 나아가 그런 상황에서도 즐길 요소를 찾을 수 있는가 궁금했다.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떠나본 적이 없어서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장소에서만 가지는 특징이 나에게는 환기가 되었다. 바깥을 달리는 트램은 노을을 머금고 달리면서 항상 바빴던 나에게 평온한 마음을 주었고, 집으로 걸어가는 늦은 발걸음은 아스팔트가 아닌 나무와 별이 채워주었다.

어디서나 적응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많은 특징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특히 내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는 이 눈으로, 나는 이제 서울에서도 행복을 잘 찾아내고, 나를 어여쁘게 바라볼 수 있다.

 

지나고 나니 가지게 된 것이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물음표 하나만 품고 한국을 떴다.